책읽는 여자

지구에서 한아뿐

하얀 종이 2019. 11. 9. 15:27




정세랑 작가님의 장편소설 '지구에서 한아뿐'입니다.

  

  

정세랑 작가님의 책 '옥상에서 만나요'를 읽었을 때도


정말 독특하고 마음에 드는 소설이라 느꼈는데, 이 소설도 진짜 흥미롭게 읽었어요. ^^

  


  

한아는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을 뿐더러 지구를 위한 저탄소 생활을 성실히


실천하는 의류 리폼 디자이너입니다.


한아에게는 스무 살 적부터 만난 경민이라는 남자친구가 있어요.


한아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항상 어디론가 떠나기를 좋아하는 경민의 무모함을 싫어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민이 별똥별을 보러 혼자 캐나다로 떠나버리고,


한아는 경민이 돌아오면 헤어지자는 말을 하기로 다짐해요.

 

 

얼마 후, 한아는 캐나다에 운석이 떨어져 천체 관측을 하던 사람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보고 크게 놀라 경민에게 연락을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경민은 전화를 받지 않고 한아는 더 애가 탑니다.


다행히 며칠 후 경민이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진 듯한 경민.


예전에는 한아가 뭘 하든 관심도 없고 한아에게 늘 퉁명스러웠는데, 캐나다에서 돌아온 후의 경민은


한아의 말도 잘 듣고 한아에게 훨씬 다정해졌을 뿐더러, 경민을 좋아하지 않았던 한아의 절친 유리마저


경민과 친해질 만큼 사람이 훨씬 좋아진 것이죠.

  

  

캐나다에서 돌아온 경민은, 지구인 '경민'의 탈을 쓴 외계인이었어요.


지구인 한아를 보고 첫눈에 반해 2만 광년을 날아온,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외계인~*^^*

 



















솔직하지 못한 한아였지만, 오랜만에 심장이 뛰었다. 가벼운 위험, 몇 센티미터쯤 죽음과 재난에

가까이 간 것만으로 경민이 이렇게 변화했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앞으로 변화할 게 더 남아 있다면,

오래된 관계를 체념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등뒤에 경민의 시선이 머무는 걸 느끼며, 마치 그런 시선을 감지하는 신경세포가 따로 있는 것처럼

강렬하게 느끼며, 한아는 문을 닫았다.

문을 닫았지만, 그날은 아무것도 닫히지 않았다. 

[p.25]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면 좋겠는데, 머릿속에서 재차 시간을 계산해보며 경민은 한아를 기다렸다.

오지 않는다 해도 이해할 수 있다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마음에 어떻게든 마찰을 만들려고 하고 있을 때

모퉁이를 도는 한아가 보였다. 어두운 한아의 표정에도 경민은 반가웠고, 북받쳐올랐고, 사랑을 확신했다.

등을 곧게 폈다.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었다.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p.77]

 

 

 

 














"그리고 반해버린 거지.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반하는 바람에, 우리 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 거?

하지만 첫번째로 널 보고 널 생각한 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온 거야."

[p.101]

 

 

 













 

"자, 상이야."

"상?"

경민이 솜사탕의 촉감에 놀라 하며 물었다. 감각 변환기가 아주 고장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메슥거려 하며 수고스럽게 와줬으니까."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솜사탕을 떼어먹고는 경민이 아, 하고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어때?"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아."

"그치?"

"이거 말고 너."

[p.132]

 

 

 

 

 













"다시 여행하고 싶지는 않아? 공항에 오니까 여행 싫어하는 나도 막 그런 기분이 드는데."

"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마." 

[p.137]

 

 

 

 













경민은 인간처럼 잠이 드는 게 좋았다. 단순히 무의식에 접속하는 게 아니라,

정말 눈꺼풀을 감고 몸을 늘어뜨리는 행위를 모사하는 게 좋았다. 한아가 세상을 슬퍼하거나 아프게 생각하지 않고

편안히 잠들면 그 풀어진 표정을 보는 것도 좋았고, 그럴 때마다 지구에 날아온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안도감 속에서 경민 역시 꿈결에 들어가면, 무의식으로 연결된 먼 곳의

속삭임이 경민의 행운을 축하해주었다. 경민은 오만해질 정도로 행복했다. 부럽지? 그러니까 너희들도 얼른 달려가.

하얗게 타는 발자국을 남기면서 열심히 달려가란 말이다.  [p.181]

 

 

 

 

 












아, 입술이 거기 있었다.

대단한 존재감의 입술이었다. 한아는 눈을 감았고 자신의 차갑고 젖은, 치약 맛이 나는 입술에

경민의 온도 높은 입술이 닿는 걸 느꼈다. 떠나기 전보다 조금 거칠게 느껴졌고, 입술 주름들이 도드라진 것 같았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말이다. 한아의 모든 세계가, 경민의 입술에서부터 폭발적으로 뻗어나갔다.

다시 집이 생기고, 별이 생기고, 무한대로 뻗은 항로가 생겼다. 숨을 내쉬었다. 우주적인 입술이었다.  [p.215]







 

  












  

얼핏 읽으면 가벼운 러브스토리 같지만


실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산다는 것, 사람이 어떤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주는 묵직한 이야기 같습니다.



아름다운 푸른 별, 지구를 지키기 위해


소소하지만 큰 실천을 하는 인물들도 무척 사랑스러웠구요. ^^



한아와 경민을 둘러싼 사람들, 한아의 친구 유리와


싱어송라이터 아폴로와 아폴로 팬클럽회장 주영의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정세랑 작가님이 무려 10년 전 쓰신 소설이라네요.


난 왜 여태껏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몰랐을까요...ㅜㅠ

    


 

정세랑 작가님의 기발한 재치와 달콤한 메시지로 그득한 SF 판타지소설 '지구에서 한아뿐' 잘 읽었습니다.

 

너무 재미있었어요.


강력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