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어 서점
김초엽 작가님의 소설집 ‘행성어 서점'입니다.
열네 편의 짧은 단편소설들로 구성된 책이에요.
저는 김초엽 작가님의 책들 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사이보그가 되다'와
'방금 떠나온 세계' 이렇게 세 권을 읽었어요.
다 매력적인 책들이었지만, 이번에 읽은 '행성어 서점'은
기존의 책들과는 조금 스타일이 다른 책이었습니다.
각 소설들이 무척 짧은 분량으로 써져 있어서 작품이 다소 어설프고 싱거운 마무리로 끝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그 염려가 무색하게도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잘 어우러진 최인호 작가님의 감성적인 일러스트도 좋았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 애는 말했어. '파히라, 내가 당신을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딱 한 번만요.'
나는 팔을 벌려 그 애를 안았어. 끝까지 안고 있었지. 비명을 참고 눈물을 참으며,
피부 표면을 칼로 베어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사랑일까, 아니면
고통을 견디는 것이 사랑일까 생각하면서."
['선인장 끌어안기' p.30]
그렇게 말하고 두 남자는 똑같은 목소리로 키득거렸다. 그들은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나와 줄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나는 멜론 장수의 말을, 그게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로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면, 한 세계에서는 멜론을 팔고
다른 세계에서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같은 존재라면, 어느 세계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건
아주 슬픈 일이어야 할 텐데.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정말로 유쾌해 보였다.
['멜론 장수와 바이올린 연주자' p.52]
"당신, 이곳 말을 할 줄 알아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럼 이 책도 읽을 줄 알아요?"
"당연하죠."
['행성어 서점' p.70]
다른 행성 여행자들은 여전히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였지만, 누구도 기록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여행자들은 다 같이 숨을 죽이고 바람 소리, 연필이 긁히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눈앞의 별안개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빛과 그림자가 변화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람조차 완전히 멈추었고,
정적 사이에 사각사각 무언가를 쓰거나 그리는 소리만이 끼어들었다. 리키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들으며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을, 언젠가는 결국 사라지고 말 순간을 지켜보았다.
['포착되지 않는 풍경' p.106]
"어차피 가면을 쓰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모르지요. 생각해보세요. 저는 지금 당신을 향해
웃고 있을까요? 아니면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어느 쪽이든, 그게 제 진심일까요?"
소은은 말문이 막혔다.
"가면이 우리에게 온 이후로 우리는 억지웃음을 지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가면은 거짓 표정을 만들어내는 대신
서로에게 진짜 다정함을 베풀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게 시몬 사람들이 여전히 가면을 쓰는 이유랍니다."
['시몬을 떠나며' p.136]
그래도 어느 순간 다현은 인생의 쓴맛이라는 비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어디선가 그런 맛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 때면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사장과 나누었던 기묘한 점심을 떠올리곤 한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 다른 행성에서
스쳐 지나갔을지 모르는 그와의 대화를, 그리고 구름을 한 스푼 떠먹는 느낌이었던 푸딩의 맛을.
그러다 보면 혀끝에 약간의 알싸한 단맛이 감도는 것 같기도 했다.
['지구의 다른 거주자들' p.206]
사실, 저는 이 책을 읽기 전 표제작 제목인 '행성어 서점'의 '행성어'가
소설 속에서 말하는 '언어의 종류'가 아니라 '물고기'를 칭하는 건 줄 알았어요. ^^//
무척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김초엽 작가님은 작년에 무척 많은 책을 출간하셨어요.
너무 많은 책을 내셔서 혹시.. 작가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닌가 걱정스러웠는데,
작가님은 그간 써왔던 작품들을 약속한 계약 날짜에 맞춰
차례대로 출간한 것뿐이라고 덤덤히 말씀하셨죠.
김초엽 작가님의 소설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작가님의 책을 자주 접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
저도 흥미진진하고 탄탄한 필력으로 성실하게 글쓰는 소설가가 되겠습니다.
김초엽 작가님의
짧은 분량이지만 긴 여운이 남는 매력적인 소설집 ‘행성어 서점’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