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여자

기사단장 죽이기

하얀 종이 2017. 8. 22. 15:57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입니다.


한국에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이죠.


저도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판타지와 역사가 한데 섞인 기묘한 소설을 무척 좋아해서


'기사단장 죽이기'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삼십대 중반의 초상화가 '나'는 아내에게서 갑자기 이혼 통보를 받고 집을 나와서


친구 마사히코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일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산속 아틀리에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 천장 위에


숨겨져 있던 도모히코의 미발표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견합니다.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의 등장인물들을 일본 아스카 시대로


옮겨놓은 듯한 그 그림을 가지고 내려온 뒤로, '나'의 주위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잇달아 일어납니다.


골짜기 맞은편 호화로운 저택에 사는 백발의 '멘시키 와타루'라는 기묘한 이름의 남자가 거액을 제시하며 초상화를 의뢰하고, 한밤중에


 들리는 정체 모를 소리를 따라 집 뒤편의 사당으로 가보니 돌무덤 아래에서 방울이 홀로 울리고 있고.. 멘시키의 도움으로 돌무덤을


파헤쳐보니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어놓은 듯한 원형의 석실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나'의 앞에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 속에 그려진 '기사단장'이 나타납니다.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전개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동안에는 대부분 아무리 주의깊게 둘러보아도 불가해한 요소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쉼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1권 p.95]

 

 

















나는 그 시점의 내가 기억하는 그애의 얼굴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구체적인 형태로 그려서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나는 아직 열다섯 살이었고, 기억에 대해서나 그림에 대해서, 또한 시간이 흘러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지는 못했다. 그래도 현재의 기억을 고스란히 보존하려면 어떤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냥 내버려두면 곧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아무리 선명한 기억일지라도 시간의 힘은 그보다 훨씬 강력하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1권 p.187]

 

 

 













자신은 가정생활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멘시키는 잘 알았다. 아무리 사랑하는 상대일지라도

타인과 일상을 공유할 수는 없다. 그는 매우 고독한 집중력을 필요로 했고, 그 집중력이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흐트러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누군가와 함께 생활한다면 언젠가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될지 모른다. 그 상대가 부모이건, 아내이건, 아이이건.

그는 그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1권 p.238]

















"우리 인생에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왕왕 있다는 말이죠. 그 경계선은 꼭 쉬지 않고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날 기분에 따라 멋대로 이동하는 국경선처럼요. 그 움직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자신이 지금 어느 쪽에 있는지 알 수 없어지니까요." [1권 p.340]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야, 기사단장이 귓전에 속삭였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봐두게나. 판단은 나중에 하면 돼.

[1권 p.475]

 















 

 

 

"자기 안에 그런 풍경을 하나 가지고 있다는 건 멋진 일이야."

[2권 p.19]

 

 
















"시련은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예요.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훗날 쓸모가 있습니다."

[2권 p.153]

 
















사람은 무언가를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 나는 생각했다. 어떤 특수한 채널을 통해 현실이 비현실이 될 수 있다.

혹은 비현실이 현실이 될 수 있다. 만약 간절히 염원한다면. 하지만 그것이 사람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증명하는 건 오히려 그 반대의 사실인지도 모른다.

[2권 p.217]







 







그가 밤새 무슨 생각을 할지 물론 나는 알 수 없다.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하지만 말할

필요도 없이, 그 또한 시간과 공간과 개연성에 매인 채 살아가고 있다. 이 세계의 모든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그 제약에서 도망칠 수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천지사방을 둘러싼

견고한 벽 안에서 살아가는 셈이다. 아마도. [2권 p.285]

 

 
















"우리 인생에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고, 또 설명해서는 안되는 일도

많습니다. 특히 설명함으로써 그 안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에는요."

[2권 p.450]














 




"완성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모든 사람은 언제까지나 미완성이야."

[2권 p.568]

 

 

















 

"나는 물론 내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은 나와 상관없는 데서

멋대로 결정되고 진행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어. 다시 말해 나는 언뜻 자유의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정말로 중요한 일은 무엇 하나 직접 선택하지 못하는지도 몰라." [2권 p.581]





















여름을 맞이해 여행을 가려고 하다가.. 다리를 다쳐


여행 취소하고, 집에서 만나게 된 소설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책은 저에게 기대를 품은 여행티켓입니다.


그 여행티켓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지는 나조차도 모르지만...ㅋㅋㅋ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역시 제게 무척 흥미로운 곳으로의 여행을 떠나보내준 여행티켓이었어요.


익숙하면서도 뭔가 새로운 분위기의.. 동양 국가로의 여행이라고 할까요. ^^



누구도 완벽한 인생을 살 수 없고, 시련이 사람을 단단하게 해주며,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인생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 참 와닿았습니다.


소설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인 듯한 이야깃거리를 털어놓는 부분도 좋았고..


덕분에 깁스한 다리로 인한 여름 여행 취소의 우울감을 잠시나마 내려놓는 시간이었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이 자신만이 가진 필체로


이런 흥미로운 소설을 오래오래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