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
요시다 슈이치 작가님의 장편소설 '악인'입니다.
이 소설도 제가 많은 일본문학을 접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 만난 책이에요.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강하게 한방 날아오는, 요시다 슈이치 작가님의 여느 소설과는 달리
'악인'은 책장을 펼치는 처음부터 세게 훅, 들어옵니다.
몇번을 읽어도 충격적인 소설...ㅡ.ㅜ;;
후쿠오카와 사가를 연결하는 263번 국도의 미쓰세 고개에서 이시바시 요시노라는 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소설은 시작됩니다.
요시노라는 여자를 살해한 사람은 만남 사이트를 통해 알게 되어 그녀와 몇번의 관계를 맺은 토목공 유이치라는 남자에요.
처음, 요시노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사람은 요시노의 남자친구이자 온천여관을 경영하는 부모의 지지를 받으며
여자를 갖고 노는 장난감쯤으만 여기는 한량으로, 행방불명되어 지명수배된 마스오라는 대학생입니다.
반면, 정작 요시노를 살해한 유이치는 속으로는 죄책감에 괴로워하지만 겉으로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척하면서
만남사이트를 통해 미쓰요라는 여자와 문자를 주고 받다가 만남을 갖습니다. 요시노와 문자를 주고 받았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경찰조사가
계속되면서 좁혀지는 수사망에 초조함과 불안함을 느낀 유이치는 미쓰요와 함께 도피생활을 시작합니다.
결국 그들의 도피생활의 끝은 유이치가 잡혀 죗값을 치르게 되고 미쓰요가 평범한 삶으로 돌아와 적응하려고 하면서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유이치는 한밤중에 고갯길을 달릴 때마다 언젠가는 자기 차가 그 빛 덩어리를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공상을 한다. 빛 덩어리를 붙잡은
차는 순식간에 그곳을 뚫고 나가고, 뚫고 나간 그 앞에는 여태껏 본 적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유이치는 그 광경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옛날에 영화에서 본 지중해라는 유럽의 푸른 바다나 역시 영화에서 본
은하 같은 갖가지 광경을 떠올려보지만, 아무래도 이거다 싶은 장면은 없었다.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본 것에 의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상상해본 적도 있지만, 그러면 곧바로 눈앞이 새하얘지면서 자동차 라이트가 만든 빛 덩어리 같은 걸
통과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p.42]
유이치는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 병원을 빠져나갔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유이치의 모습이 달빛에 비쳤다. 바로 앞에 있는 주차장으로
가는 것뿐인데, 미호의 눈에는 그가 아주 멀고 먼 곳으로 가는 것처럼 보였다. 밤의 저 너머에 또 다른 밤이 있다면
그는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것 같았다. [p.158]
지금까지 외롭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외롭다는 게 어떤 건지 몰랐다. 그런데 그날 밤을 고비로 이제는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외롭다는 것은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길 간절히 바라는 기분일지도 모른다고 유이치는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얘기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자기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p.209]
미쓰요는 떨리는 유이치의 손을 잡았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단순히 '안녕' 이란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안녕' 에는 아직 미래가 있다. 미쓰요는 갑자기 자기가 어처구니없는 잘못을
저지른다는 생각이 들어 유이치의 손을 있는 힘껏 움켜잡았다. 뭔가가 끝나가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뭔가가 결정적으로 끝나가는 것이다. [p.371]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지.
자기에겐 잃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강해진 걸로 착각하거든. 잃을 게 없으면 갖고 싶은 것도 없어. 그래서 자기 자신이
여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잃거나 욕심내거나 일희일우하는 인간을 바보 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안 그런가? 실은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야."
[p.448]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제게 물음표를 던집니다.
과연 이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 즉, '악인'은 누구냐고.
보험회사에서 일하면서 동료들에게는 근사한 대학생 마스오와 사귄다고 거짓말하고 만남사이트를 통해 남자를 만나다 살해당한 요시노.
쇼핑센터의 남성복 매장에서 일하면서 인터넷사이트로 만난 유이치와 만남을 가져보려는 미쓰요.
온천여관을 하는 부잣집 아들로, 요시노를 비롯한 여자들을 하룻밤 장난감으로만 여기는 마스오.
조손가정에서 착하게 자라면서 미쓰요와 만나보려 하다 문자만 주고받던 사이인 요시노를 살해한 유이치.
그들의 인권을 무시한 채 '알 권리'라는 명목하에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매스컴.
인간이 타인의 선과 악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을 긋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 모호함을 어떻게든 구분짓기 위해 법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일 테죠.
'악인'은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닙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찾는다기보다는,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말하는 소설입니다.
저에게 이 소설은...
읽을 때마다 생각을 달리 하게 해주는 작품이에요.
소설가로서 이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려면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도
참 많이 공부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선과 악이라는 묘한 경계를 멋지게 그려낸 소설 '악인'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