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혼비 작가님의 산문집 '다정소감'입니다.
눈만 빼꼼 내밀고 있는 산뜻한 표지의 흰 띠지를 걷어내면, 웃는 입모양이 보입니다.
코로나 시대의 반쪽짜리 미소를 이미지화한 표지를 보고 있으면.. 참 많은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이렇게 마스크 속으로 감정을 숨긴 채 살고 있다는 생각.
인간관계, 직장생활, 자신이 겪은 시간들을 무사히 지날 수 있게 해준 사람들과
다정을 주고받은 기억에 대해 쓴
통쾌하면서도 따스한 글로 가득한 책.
김혼비 작가님의 다정한 마음이 느껴지는 좋은 책이었어요.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다.
그래, 이거였다. 나는 갑자기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어졌다. 지구상의 중요도에 있어서
김도 못 되고, 김 위에 바르는 기름도 못 되고, 그 기름을 바르는 솔도 못 되는 4차적인(4차 산업혁명적인
게 아니라 그냥 4차적인) 존재이지만, 그래서 범국민적인 도구적 유용성 따위는 획득하지 못할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분명 그 잉여로우면서도 깔끔한 효용이 무척 반가울 존재.
[p.19]
당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른다는 점도 공포의 요인이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상상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고통을 떠올리며 더 심하게 얼어붙곤 했다. 그런데 그라운드에서 몸싸움을 하면서
'맞는'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고통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고, 그렇게 고통이 구체성을 띠고
다가오니 그게 또 두려움을 한결 줄였다. 적어도 나를 집어삼킬 정도로 커지지는 않았다. 이것만도 굉장한
발전이었다. 우리는 보통 폭력에 제압당하기 전에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 먼저 제압당하니까.
수비수 한 명을 제친 기분이었다.
[p.48]
관심이란 달짝지근한 음료수 같아서 한 모금 마시면 없던 갈증도 생긴다는 것을,
함께 마실 충분한 물이 없다면 건네지도 마시지도 않는 편이 좋을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한다.
순간의 기분으로 문 너머 외로운 누군가에게 다가가려다가도,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결국에는
가장 차가웠던 그때의 내가 떠올라 발을 멈춘다. 끝까지 내밀 손이 아닐 것 같으면 이내
거둔다. 항상성이 없는 섣부른 호의가 만들어내는 깨지기 쉬운 것들이 두렵다. 그래서 늘 머뭇댄다.
'그럼에도' 발을 디뎌야 할 때와 '역시' 디디지 말아야 할 때 사이에서.
이 사이 어딘가에서 잘못 디딘 발자국들 사이에서.
[p.136]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흔히 말하는 '연대'의 감각 아닐까. 망했다는 생각에
손마저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는 손들 같은 것. 그 손들이
누군가를 필요한 형태로 만들어가는 과정 같은 것. 등 뒤로 따뜻한 눈빛들을 가득 품고 살짝 펴보는 어깨 같은 것.
누군가 박살 날까 봐 걱정될 때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
[p.152]
시리얼은 지금까지도 조금 애틋하고 각별한 음식이다. 마침 시리얼을 즐겨 먹던 시기가 유년 시절과 겹쳐서
더욱 그렇다. 마냥 유치했고, 삶의 구겨진 이면 같은 걸 잘 모른 채 세상 모든 걸 총천연색으로 받아들였고,
생기가 넘쳐흘러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던, 인생에서 아주 짧았던 시절. 사는 게 지나치게 복잡하고 고단하게 느껴져
유치함에서 흘러나오는 천진한 힘이 필요한 날이면 우유에 시리얼을 붓는다. 그 한 그릇 속에는 나의 유년이
담겨 있다. 이제는 원한다면 언제든 과자를 먹을 수 있는 성인이지만 시리얼을 먹을 때만큼은
어린애의 마음으로 돌아가 "우와! 아침부터 과자 먹어!"를 외치고는 신나서 현관을 나서는
것이다. 그런 날은 대개 괜찮고 괜찮다.
[p.185]
한 입 두 입 계속 먹을 때마다 몸속을 세차게 흐르는 뜨겁고 진한 국물에 심장에 박혀 있던
비난의 가시들이 뽑혀나가는 것 같았다. 마음의 틈새마다 눌어붙어 있던 자괴와 절망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국물이 흘러들어오고 눈물이 흘러나가면서 내 눈에 옮아 있던 날 선 눈빛들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쁜 것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사리곰탕면이 새겨 넣은 메시지는 이랬다. '너는 누군가가 이틀을 꼬박 바쳐 요리한
음식을 기꺼이 내어줄 정도로 소중한 존재야. 잊지 마.' 나를 따라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J와 함께 울며,
그리고 불며 싹 비워낸 한 그릇은 그렇게나 시원했다.
[p.210]
김혼비 작가님은 '전국축제자랑'이라는 작가님의 책을 통해 처음 만났어요.
그 책을 읽으면서 글을 정말 맛있게 잘 쓰시는 작가님이라고 느꼈는데, '다정소감'도 너무나 따스하고 재밌었습니다.
책 속 모든 에피소드가 좋았지만
김혼비 작가님이 승무원이었던 시절,
동료들의 이야기와
친구가 끓여준 사리곰탕면 이야기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마스크가 얼굴을 가리고 서로의 감정을 읽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더 건조해지고 차가워진 세상 속에서
소소한 다정을 발견하는 김혼비 작가님.
읽으면서 재미와 따스한 다정함이 그득 느껴지는 책이었어요.
김혼비 작가님의 따뜻한 산문집 '다정소감'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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