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작가님의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입니다.
이미 너무 유명한 스테디셀러죠.
사람들이 다들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하던데... 저는 개정판이 나오고 나서야 읽었습니다. ^^//
'피프티 피플'은
병원이라는 큰 공간을 중심으로 50여 명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입니다.
50여 명이 각자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연결성이 있는 사람들이죠.
간호사, 의사, 방사선사와 보안요원, 환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 연결되는 또다른 이들의 이야기들...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는 소설이었어요.
사락사락.
아마도 그런 소리가 났을 것이다. 그때 자기도 모르게 수정은 울컥하고 울었다. 나중에 이날을
기억할 때 엄마가 도는 저 모습이 기억날 거란 걸 수정보다 수정의 눈물기관이 먼저 깨달은 것 같았다.
아, 어떡해. 장갑으로 얼른 눈가를 훔쳤다.
하지만 나쁘지 않잖아, 수정은 생각했다. 엄마의 강인함도, 엄마가 맨날 부리던 억지도,
이상하게 저 사락사락함으로 기억날 것만 같으니까.
[p.13]
아가야, 웃으렴. 겁내지 말고. 팔매질을 하렴. 운동회 날 박을 터뜨리려 애를 쓰는 아이들처럼.
싸우렴. 다치지 말고. 구멍에 빠지지 말고.
애선은 한때 자기가 얼마나 딸을 가지고 싶어 했는지를 떠올렸다. 두 며느리를 생각하자 딸과
그리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자식이 넷이구나, 넷. 보살이 아니라 아수라가 되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자식이 넷. 그러나 그 아이들을 지킬 건 팥밖에 없고. 팥 정도밖에 없고.
[p.46]
밤새 또 누가 살해를 당하고 사고를 당했을까. 윤나는 두 팔을 올려 스트레칭을 했다. 살아 있는 게
간발의 차이였다. 그 '간발차'의 감각이 윤나를 괴롭혔다. 자칫했으면 이 팔들이, 살아 있는 팔들이 썩고 있을
뻔했다. 죽음은 너무 가깝다. 언제나 너무 가깝다. 전철에서 지나치게 몸을 밀착하는 기분 나쁜 남자처럼
가깝다. 무시하고 잘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반면 윤나는 늘 등 뒤를 돌아보고야 마는
편이었다. 전철 전체가 암전되듯이 마음 전체가 까매지고 마는데도.
[p.125]
"언제부터 공부 잘하면 의사 될 수 있어요?"
"되고 싶어?"
"네, 근데 공부 잘 못해요."
"공부도 잘해야 하고 운도 좀 좋아야 해."
아이는 운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운이 좋았던 적이 있어야 이해할 것이다. 큰 파도를
타는 것과 비슷했다. 파도가 부서질 줄 알았는데 계속되었다. 평생 그랬다. 유학생 출신답게 호 선생은 생각했다.
'그레이트 라이드'였다고. 그 좋았던 라이드가 이제 끝나간다. 그렇다면 나눠줘도 좋을 것이다.
"내가 운을 좀 나눠 줄게. 악수."
아이가 피식 웃으며 악수에 응했다. 싱거운 할아버지라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p.144]
연모의 손이 계속 굳은살 없이 부드러웠으면 했다. 사과나 깎으면서, 엉망인 세계 가운데를
살아가지 않았으면 했다. 아이인 채로 계속 있게 해줄 수는 없는 것인가. 바람에 춤추는 풍선을 손목에
감고 유원지를 걷듯이 살아가게 해줄 수는 없는 것인가. 분명 어딘가에는 그렇게 해줄 수 있는 능력 있는
부모도 있을 텐데, 진곤은 자신이 그런 부모가 아닌 게 속상했다. 멍든 곳, 긁힌 곳, 금이 간 곳,
고름 나는 곳이 속상할 때마다 아파왔다.
[p.185]
리조트가 별로 없는 곳이라 관광객도 적었다. 인지는 조금 외롭지만 기분 좋게 해변을 걸어다녔다.
동네 아이들이 선물이라며 죽은 산호 조각을 건넸다.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빨리 부서졌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패러글라이더들이 보였다. 전혀 떨어질 것같이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착륙을 할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영원히 거기 떠 있을 것처럼 여유 있게 날았다. 난기류를 만나기 전까지는 모두 괜찮아.
난기류를 만난 사람도 무사하기도 하고. 하지만 언젠가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오겠지. 인지는
발가락 사이로 파도에 끌려가는 모래를 느꼈다. 인지도 언젠가 이런 작은 조각들이 될 것이다.
[p.233]
"할아버지 첫사랑은 어떤 분이신데요?"
"세상 무서운 게 없는 여자였지. 덩치 큰 남자도 산짐승도 무서워하지 않아서 밤에 고갯길도
막 넘어다녔어. 험하디험한 시절이었는데 말이야. 웃지도 않고 말도 어찌나 매섭게 하는지.
근데도 좋았어. 겁먹은 표정을 한번도 짓지 않았어. 모두가 겁먹은 얼굴을 하고 살 때였는데 그게 신기했지."
[p.315]
연모는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지은의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을.
"처음 좋아하게 된 걸 계속 좋아하지 않게 되어도, 다음 걸 또 찾으면 돼요."
사실 연모는 말하면서도 잘 몰랐다. 완전히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행운아인지 제대로 모르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p.397]
소씨 아저씨를 배웅하러 장례식을 나서, 로비 바깥까지 따라 걸었다. 밤바람이 차고 맑았다.
"눈이 닮았네요."
"안 닮았는데요."
"닮았어요. 눈 안에 심지가 있어요. 가장 의지했던 딸인 거 알지요?"
듣기 좋은 말을 하는 할아버지네, 승화는 웃었다. 오래된 상처를 그 말들이 연고처럼 덮었다.
승화는 한마디도 믿지 않고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고마웠다.
[p.440]
‘피프티 피플’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지만, 잠시 생각해보게 되는 사회적인 이슈도 자주 등장했어요.
가습기살균제, 층간소음, 씽크홀, 직장내 괴롭힘, 성소수자, 대형 화물차 사고 등등…
책을 읽으면서..
작품 자체도 너무 좋았지만, 이 많은 자료들을 조사하신 게 정말 대단한 작가님이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책은 2016년에 출간되었다가, 2021년에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어요.
정세랑 작가님은 맨 마지막 장 ‘새로 쓴 작가의 말’에서
만약, 이 소설이 2016년이 아닌 2021년에 나왔다면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 중
절반 쯤은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서,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라는 작가님의 보드라운 마음이 느껴지는 말씀...
불안하게 휘청이는 세상 속에서, 용감하게 살아가는 내가 되고 싶습니다.
정세랑 작가님의 흥미롭고 감동적인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책읽는 여자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정소감 (0) | 2021.12.06 |
---|---|
나만 괜찮으면 돼, 내 인생 (0) | 2021.11.24 |
꽃별이 되어라 (0) | 2021.11.01 |
사랑별꽃 (0) | 2021.10.25 |
내 곁에서 내 삶을 받쳐 주는 것들 (0) | 2021.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