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여자

잠옷을 입으렴

하얀 종이 2017. 10. 11. 10:56




이도우 작가님의 소설 '잠옷을 입으렴'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건 5년 전에 나온 책인데, 2년 전에 개정판도 나왔네요.


이도우 작가님 소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이 책도 그런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잠옷을 입으렴'은 슬픈 소설이었습니다.



엄마가 집을 떠난 후 모암마을 외갓집에 맡겨진 열한 살 소녀 둘녕.


그곳에는 외할머니와 이모 가족, 막내이모와 막내삼촌 그리고 동갑내기 사촌 수안이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한 사이였던 수안과 둘녕은 차차 마음을 열게 되고,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아이 수안과 그리움을 꾹꾹 참고 살아가는 아이 둘녕은 서로 특별한 우정을 나누며 자랍니다.

포플러 신작로를 걸으며 집으로 돌아오던 시절, 소녀들을 넓은 세상으로 여행시켜준 계몽사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ABE문고, 클로버문고...


 늘 맛있는 음식이 나오던 외할머니의 부엌, 문갑을 채우고 있던 만병통치약들,


잠이 오지 않는 여름밤 모깃불 아래서 속삭이던 비밀 이야기들...



다 크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 그리고 자라나면서 상처와 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녀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읽다가 어느 순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수안이 행복하지 않은데 나 혼자 행복해진다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수안뿐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얻는 행복의 평균이 있다면 나도 그 정도이길 바랐다. 혼자서 더 행복한 건 어쩐지 불안하고, 남의 행복에서 덜어온 듯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세상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의 양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고 느꼈던 날들이 있었다.

누구 하나가 많이 행복하면 다른 하나가 그만큼 불행할지도 모른다고.

타인의 행복이 커진다고 해서 내 행복이 줄어들진 않는다는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세월이 많이 걸렸다.

[p.25]

 















 

 

그 시절 그 아이는, 어쩌면 세상에 없는 언어로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가는 꼭꼭 숨어있는 말들을 찾아

배우고 싶었나 봅니다. 늘 쓰던 흔한 언어로는 말이 되어 나오지 않을 때. 이미 죽은 언어라는 사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일 때. 살다보면

나도 그런 마음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 어떤 언어로도 내 마음을 표현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말도 글도 쉽게 만들거나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럴 때면 나는 그냥 침묵합니다.

[p.110]

 

 

 
















다 그런 것이었다. 어린 존재를 사로잡은 우상은, 그러나 어느 날 그들의 세계로 우리가 한 발짝 걸어 들어갈 때면

새삼 긴장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모든 걸 이해해주던 마음은 상대가 선을 넘는 걸 깨닫는 순간 경고음을 보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의 깊은 곳을 엿본 기분일 때, 우리는 실망했고 배신감을 느끼며 약간씩 상처받았다. [p.258]






 

 













세월이 흘러도 만약 네가 아무 데도 안 갔다면, 너는 아직도 그곳에 있는 거겠지. 그렇지?

[p.271]

 

 

 
















 

대체 몇 살이 된 거죠?

서른여덟.

저런, 완전히 어른이네요.

그래. 하지만 어른도 괜찮아. 살아보니 어른도 좋아. [p.283]

 

 

 

 















그녀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아직도 날 좋아하지 않는구나 말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다고 나는 속삭였다.

서로가 살갑지는 못했어도 한 번도 싫어한 적은 없었다고. 우리는 설명하는 데 서툴렀고 모든 관계에 서툴렀다.

다정히 다가가 등을 껴안으며 그동안 내 마음은 이러했답니다 고백하기엔, 저마다 진심을 전하는 법을 잘 알지 못했다. [p.408]

 

 

 

















 

한때 내 것이었다가 나를 떠난 것도 있었고, 내가 버리고 외면한 것도,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던 것도 있다.

다만 한때 몹시 아름다웠던 것들을 나는 기억한다. 그것들은 지금 어디로 달아나서

금빛 먼지처럼 카를거리며 웃고 있을까. 무엇이 그 아름다운 시절을 데려갔는지 알 수가 없다.

[p.463]





















그 시절에는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는 것 같아요.


아파도 조금만 견디면 낫고, 졸린 걸 참아가며 이야기 나누고, 다쳐도 약 바르고 다시 나가 놀던 그 시절..



둘녕은 곁에 있던 이들이 떠나고, 첫사랑이었던 소년을 스쳐보내고, 몽유병을 앓게 되어 밤마다 과거의 이들을 만납니다.


그렇게 둘녕의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둘녕을 소녀에서 어른으로 만듭니다.



이 소설 속에는 작가님이 만든 이야기뿐 아니라 어린 시절 동화책과 소년소녀문고 같은 정겨운 이야기들도 많이


나오는데, 다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인데도 왠지 모르게 얼마 전까지 읽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



떠난 사람들 그리고 상처와 병을 안고 살아가는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잠옷을 입으렴'


어쩌면, 우리가 치열하게 버티며 살아가는 것도 그들이 남기고 간 상처와 병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파도, 슬퍼도 씩씩하게 살아갑시다.


둘녕이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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