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훈 작가님의 소설집 '위험한 비유'입니다.
작가님의 책 '퀴르발 남작의 성'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
문득 생각이 나서 최제훈 작가님 책을 찾아보다가 발견한 책이에요.
흔한 커플의 흔하지 않은 이야기 '철수와 영희와 바다'
자율주행이 보편화된 시대의 교통사고를 다룬 이야기 '2054년, 교통사고'
리얼돌과 살인사건 이야기 '마네킹'
노인이 그리는 초상화마다 나타나는 여자의 얼굴 '미루의 초상화'
스쿠루지 영감의 반전 동화 '유령들'
지하철 터널 안에서 마주친 노인과 괴생명체 '마계 터널'
중고세탁기를 건네받은 여인이 죽는 사건이 발생한 후 용의자를 취조하며 벌어지는 이야기 '현장부재증명'
상상 속에서 나뒹구는 이야기 '위험한 비유'
모두모두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습니다. ^^
"튜브는 위대한 발명품이야."
철수는 손끝으로 튜브를 꾹꾹 눌러 공기압을 확인했다.
"사람 숨을 가둬서 물에 띄울 생각을 했다니."
"인공지능이 바둑 두고 소설 쓰는 세상이야."
"걔넨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잖아."
['철수와 영희와 마네킹' p.10]
아무리 생각해도 로라가 사람으로 변하는 순간 그의 로맨스는 끝장이었다.
그 말은 단순히 적금을 붓고 소개팅을 하고 텔레비전 속 요정들을 보며
불평 아닌 불평을 하는 생활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로라는 맹물 같던 그의 일상을
한 잔의 따끈한 코코아로 만들어준 감미로운 분말이었다. 이제 와서 다시 맹물과 분말로
분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로맨스가 끝장나는 순간 그의 삶도 끝장이었다.
준기는 어디선가 혼자 뿌듯해하고 있을 사랑의 여신이 원망스러웠다. 눈치가 없는 겁니까,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겁니까? 여태 신경도 안 쓰다가 왜 이제 와서 이런 쓸데없는 기적을...... 왜!
['마네킹' p.102]
정말 노인의 그림마다 이렇게 출몰하시는 겁니까? 그녀는 배시시 웃기만 했다.
들여다보고 있자니 희끄무레한 불빛 아래 어른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낯익은 느낌이었다. 머릿속으로 진희를 떠올려보았다.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녀의 얼굴이 빙판 아래 묻힌 것처럼 흐릿했다. 하지만 차분하면서도 장난기 서린 눈맵시만은
틀림없는 진희였다. 눈에 초점을 두고 다시 전체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림이 진짜로 변한 걸까? 애당초 진희와 판박이도 아니었지 않나? 볼수록 야릇한 초상화였다.
이번에는 진희가 분장한 채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것 같았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미루라는 여자로.
['미루의 초상화' p.144]
"지하철이 터널을 지날 때 검은 차창 밖을 유심히 내다보면, 벽에 붙어 이쪽을
쳐다보는 눈동자와 마주칠 때가 있어. 아주 순간적으로, 반짝."
['마계 터널' p.204]
당신은 내가 쓴 기형의 문장이며, 아직 못다 쓴 미지의 문장이며, 그 사이를 지나는 모래바람이다.
당신은 내 머릿속을 떠도는 검은 비닐봉지, 내 꿈을 기웃거리는 버려진 기억이다.
당신은 내 온몸을 유랑하고 심장으로 회귀하는 검붉은 피다.
당신은 담배 연기에 실려 흩어지는 내 날숨이다.
당신은 붉은 그물에 걸린 내 눈동자다.
당신은 내 녹슨 손톱이다.
당신은 나다.
['위험한 비유' p.276]
최제훈 작가님의 소설은 정말 오묘하고 기괴합니다.
무서운 이야기나 영화를 잘 즐기시는 분이라면
무척 좋아할 분위기에요. ^^
저도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해서,
최제훈 작가님의 이번 책도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생각하시고 맛깔난 소설로 만드실까,
너무 부럽습니다. ^^*
한 작품도 아쉬울 것이 없는 흥미진진한 단편소설로
구성된 최제훈 작가님의 소설집 '위험한 비유'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