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작가님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입니다.
제목이 참 멋있죠?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라는 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의 한 구절이
이 소설의 제목이 되었는데, 내용과도 너무 잘 어울립니다. 역시 김연수 작가님~*^^*
할아버지의 유품인 입체누드사진으로 시작되는 거대한 이야기.
1991년 여름, 이른바 '5월투쟁'이 끝난 후 혼란스러운 사회상황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대학생 '나'는 학생 예비대표 자격으로
베를린으로 건너갑니다. 정식 대표가 올 때까지 잠시만 머무르는 것으로 알고 떠난 것이었지만, '나'가 베를린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학생운동 지도부가 갑작스럽게 붕괴되고 교체되는 과정에서 '나'는 한국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죠.
북한으로 들어갈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독일에 계속 있어야 할지, 모든 것이 불확실한 독일 체류기간 동안 '나'는
이 허무한 삶과 우연에 맞설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노트에 이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 노트에는 '나'가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에게서 들은 온갖 사연들, '나'가 기억하고 상상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기록됩니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아 죽은 동료의 이름으로 바꾸고 제3세계 망명객들의 후원자가 된 피아니스트 헬무트 베르크,
떠돌이 일용직 노동자에서 '광주의 랭보'로 그리고 다시 혁명적 문화운동가 강시우로 이 세상에 두 번 다시 태어난 이길용의 이야기,
강시우를 사랑한 레이, 모범적인 고등학생에서 느닷없는 폭행을 겪고 결국 자살에 이르는 정민 삼촌의 이야기 등... 역사의 우연한 폭력에
의해 삶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사람들이 이야기, 또 평생을 무주 산골에 살면서 세상천지 안 가본 데가 없다고 말하는 정민 할머니의
이야기나 서해 갯벌을 막아 논을 만들겠다는 만석지기의 꿈을 꾸다 간첩으로 몰려 실형까지 살게 된 '나'의 할아버지 이야기 등은
노트 안에서 저마다 독립된 이야기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그 끝을 물고 연결되는 하나의 큰 이야기로 모아집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온갖 얘기들이 말해주듯 인간의 삶 역시 항상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순간, 삶은 예전의 삶과는 달라졌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늘 예전과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유목민이나 다름없으므로 영원한 거처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p.83]
사랑은 입술이고 라디오고 거대한 책이므로. 사랑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건네므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 입술을 빌려 하는 말은, 바로 지금 여기가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라는 것이므로.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아름답게, 이토록 아름답게 연결되므로.
[p.94]
“지금 네가 느끼는 그 세상이 바로 너만의 세상이야.
그게 설사 두려움이라고 하더라도 네 것이라면 온전히 다 받아들이란 말이야.
더이상 다른 사람을 흉내내면서 살아가지 말고.” [p.254]
“믿을 수 없다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죠.”
[p.329]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이란 다시 잘 설명하기 위한 기억이다.
[p.384]
참 많이 읽은 책입니다.
재밌어서라기보다는.. 한번 읽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내용이라...^^;
어렵지만, 이해하고 싶었고, 그래서 더 기를 쓰고 더 읽고 또 돌아가 읽고...
겪어보지 못했던 운동권 이야기와 민주화 이야기는 그런 반복학습으로 알게 되었어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개인의 이야기는 '그 누구의 슬픔도 아닌'이라는 제목의 비디오와
'입체누드사진'으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묘하게 연결되어집니다.
제가 김연수 작가님의 필력을 따라가기 아직 너무 부족한 탓에... 줄거리를 설명하기도 어렵네요. ^^;
함께 있어도 우리는 결국 혼자이기에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다가가기 어렵지만,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기도 힘든 너무나 매력적이고 터프한 소설...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