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 작가님의 수필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입니다.
스물여섯 살 때부터 회사원이 되어 자투리시간에 쓴 작품으로 문학상을 받고
소설가가 된 이후 '전업작가'가 되리라 믿었던 꿈은
산산이 부서져 아직도 '박대리'와 '박작가'의 이중적인 삶을
부지런히 살고 계신 박상영 작가님.
곰인형 같은 푸근하고 귀여운 모습에서
상상하기 힘든 섬세하고 날카로운 필력으로 소설을 쓰시는 박상영 작가님.
그런 작가님이 쓰신 수필은 처음이라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며 책을 읽었어요.
너무 재밌어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
"살 빼시고 관리 좀 하시면 인기 많으실 것 같은데요? 대리님 긁지 않은 복권 같아요!"
A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는지 점심을 먹으러 나가버렸고 남겨진 나는
여러모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가 뭔데 내 외모를 평가해. 살찐 사람 몸은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해도 되는 건가. 게다가 긁지 않은 복권이라니. 상대방은 누구보다도 절실히
자신의 현실을 살아가는 중인데 타인이 왜 함부로 그 사람을 무엇이 되지 못한 존재로
규정하는 것인가. 물론 나도 그가 별다른 악의 없이, 오히려 칭찬에 가까운 의미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근데 그게 더 문제라고.
[p.39]
도저히 버티기 힘든 날이면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 삶이며, 나는
오랫동안 꿔왔던 꿈을 이룬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나는 오롯이 내 선택에 의해,
아무도 시키지 않은 지금의 이 삶을 살고 있다고.
[p.101]
나는 의자를 접으며 이것을 다시 대회의실에 가져다 놓을까, 하다가 그만뒀다.
한순간이라도 사물실에서 도망쳐 있고 싶은 누군가에게 이 의자가 유용하게 사용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쩌면 직장에 다니고 있는 모두에게 이렇게 의자가 놓인 작은 방 하나쯤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마지막으로 보일러실의 문을 닫았다.
[p.130]
돈이 좋다. 돈이 좋고 꿈이 좋은데, 스무 살 때 봤던 그 불빛과 이 불빛이
도저히 같은 불빛일 수가 없는데, 이상하게 나는 또다시 그때의 나로 돌아간 것만 같다. 영원히 이렇게
높은 곳에서 불빛을 보고 싶은데, 아직은 더, 더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고, 더 정확히 표현해야만 하는 거겠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사는 이 모습 그대로의 삶을 앞으로 이어나가면 되는 거겠지.
[p.160]
"그래도 넌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 꿈을 이뤘잖아.
심지어 그걸로 먹고 살기까지 하고. 그건 정말 운이 좋은 일이야."
[p.253]
다만 내게 주어진 하루를 그저 하루만큼 온전히 살아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같이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당신,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이 순간을 버티고 있는 당신은
누가 뭐라 해도 위대하며 박수받아 마땅한 존재다.
비록 오늘 밤 굶고 자는데 실패해도 말이다.
[p.257]
박상영 작가님의 2019 젊은작가상 대상 작품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을
읽었을 땐 충격적이었어요. ^^;
이후, 작가님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으며
'아.. 이런 독특한 문체를 가진 작가님이시구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
이 수필을 읽고, 거리 혹은 카페나 사무실에서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다양한 세계를 상상하며 글을 쓰시는 작가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어요.
창문너머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 작가님을 묘사한 맨 앞 표지도 한 장만 넘기면,
피로에 지쳐 전철에 몸을 실은 퇴근길을 그린 반전이란 것도
박상영 작가님의 달콤하면서도 고단한 삶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아요.
책을 다 읽고나니 제목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삶이 얼마나 굴곡졌는지, 우리네 하루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기에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같은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 때론 지켜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귀한 존재라는 것을요.
박상영 작가님의 솔직하고 편안한 수필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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