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여자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하얀 종이 2018. 5. 16. 15:25

 

 

 

김연수 작가님의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입니다.

 

2002년에 나온 책의 개정판입니다.

 

작고 마른 소녀가 말간 풍경을 향해 팔을 벌린 표지가 참 멋지죠. ^^

 

 

2009년에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읽은 후로 김연수 작가님의 팬이 되었습니다.

 

작가님 책들도 많이 읽고, 필사도 많이 하면서

 

소설가라는 꿈을 더욱더 풍성하게 부풀렸어요.

 

저에게 김연수 작가님은 스승과도 같은 소설가입니다.

 

 

자전적인 소설 '뉴욕제과점'을 포함한 아홉 편의 단편소설들.

 

작가님이 2002년에 낸 소설들은 어떤 빛을 담고 있을지,

 

궁금해하면서 설렘 가득한 소녀팬의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게이코가 유리창에 써놓고 간 'Merry X-mas & Happy'란 글자 옆에는 누군가의 손바닥 모양이 찍혀 있었다.

게이코의 손금이겠지. 김이 어렸지만 그 희끄무레한 손바닥 길은 그런대로 내비쳤다. 그 길은 비뚤비뚤 선 모양으로, 눈벌처럼

창을 가득 메운 하얀 김 사이에 그어져 있었다. 꼭 어디 길 같은 손금이었다. 그건 아마도 게이코가

가고 싶은 길이라기보다는 갈 수밖에 없는 길의 모양일 테다. [p.14]

 

 

 

 

 

 

 

 

 

 

 

 

 

 

 

 

서른이 넘어가면 누구나 그때까지도 자기 안에 남은 불빛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게 마련이고

어디서 그런 불빛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한때나마 자신을 밝혀줬던 그 불빛이 과연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알아야만 한다. 한때나마. 한때 반짝였다가

기레빠시마냥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게 된 불빛이나마. 이제는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불빛이나마.

[p.91]

 

 

 

 

 

 

 

 

 

 

 

 

 

 

 

 

 

사랑은 왜 두려움과 함께 오는지 그때 처음 알게 됐지.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아름다운 사랑은 망가져 버리니까. 그리고 다시는 그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없으니까.

그게 사랑이라면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돼. [p.118]

 

 

 

 

 

 

 

 

 

 

 

 

 

 

 

 

 

"잡는 그 순간에 나도 너맨치로 그놈하고 눈이 딱 마주쳤다. 그 눈에 뭐가 보였는가 아나?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 텅 비었더라.

결국 너는 못 쐈지? 나도 한참을 못 쐈다. 그래 벌써 죽은 놈이라 카는 거를 아는 이상은 못 쏘는 거라. 쏘만 안 되는 거라. 하지만

일행이 지켜보는데다가 공명심도 있응케 안 쏠 수가 없었다. 살아생전 총 한번 제대로 안 쏘고 잡은 멧돼지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p.197]

 

 

 

 

 

 

 

 

 

 

 

 

 

 

 

어두운 산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망상이 빚어낸 허상과 직면하니 그야말로 인생은 픽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인생이란 꼭 이십 미터 정도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저 발걸음 소리 같은 것이다. 거기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손전등을 밝히며 다가가면 또 이십 미터쯤 뒤, 더 다가가면 또 이십 미터쯤 뒤로

물러설 게 분명했다. 따라오려면 따라오라지. 나는 지옥 그 밑바닥까지도 갈 수 있다구. [p.216]

 

 

 

 

 

 

 

 

 

 

 

 

 

 

 

 

 

 

절대로 지면 안 된다고, 비가 뿌려도, 바람이 불어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태식이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도 지지 않을 테니, 너도 지면 안 된다고 다지르고 싶었다. 그냥 그렇게 있다가는 니 삶을 망쳐버리고 마는 거야.

니 삶을 지키려면 용기를 내야 해. 참고 견디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야. [p. 272]

 

 

 

 

 

 

 

 

 

 

 

 

 

 

 

 

 

 

 

 

 

김연수 작가님의 자전적인 소설 '뉴욕제과점'은 이미 너무나 유명하고, 누구라도 미소를 머금을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라 더할 나위없이 멋진 이야기였지만

 

저는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라는 단편이 너무나 맘에 들었습니다.

 

옛 연인이 떠올라, 새끼를 가진 멧돼지를 차마 쏘지 못하는 포수 삼촌 이야기.

 

나도 이렇게 사투리로 소설을 써봐야겠다! ^^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 진심이 느껴지는 책.

 

김연수 작가님 이야기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의지할 수 있는 불빛 조금만 있으면 됩니다.

 

 

소중한 책,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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